경찰이 못 잡는다던 ‘지인 능욕’, 직접 추적해보니 ‘중고교 동창’
텔레방 사진유출 확인한 초등교사…충남경찰에 신고했지만 “못 잡는다”
SNS 이용 4일 뒤 직접 가해자 특정…강원경찰이 수사착수 범인 붙잡아
경찰의 무성의한 초동대응 비판…피해자도 “경찰에 더 큰 상처 받아”
충남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20대 여성 박지영(가명)씨는 지난해 10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여성은 “선생님의 사진이 텔레그램 방에서 합성돼 유출되고 있으니 어서 경찰에 신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텔레그램 방 링크를 찾아간 박씨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방에서는 지인의 사진을 나체사진과 합성해 음란물로 만들어 유포하는 디지털 성범죄인 이른바 ‘지인 능욕’ 성착취 범죄가 이뤄지고 있었다. 700여명이 모인 방에 박씨의 얼굴과 나체가 합성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박씨의 이름과 나이, 직업과 주소까지 적혀 있었다. 텔레그램 방에 있는 사람들이 “더 풀어주세요”라며 나체사진을 올리면, 방장이 이를 박씨의 얼굴과 합성해 다시 올렸다. 방장은 “반응 없으면 안 풉니다”라며 계속해서 합성에 쓸 나체사진을 요구했다.
방장이 합성에 사용한 사진은 박씨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비공개 계정에 올린 것으로, 박씨를 팔로한 사람만 볼 수 있는 사진들이었다. 이 가운데에는 박씨가 고등학교 시절 올렸다가 삭제했던 오래된 사진들도 있었다. 평소 아는 사람들하고만 팔로 관계를 맺는 박씨는 ‘가까운 지인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진을 캡처해 합성했을 것인데, 이는 사실상 스토킹 범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박씨는 신고하기 위해 곧장 충남의 한 경찰서 사이버수사대로 향했다.
“텔레그램이요? 거긴 너무 보안이 세서 아마 (범인을) 잡기 힘들 거예요. 거의 못 찾는다고 보면 됩니다.” 박씨가 경찰서에서 들은 말은 절망적이었다. 경찰은 “잡기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하더니 “혹시 모르니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가라”는 말을 끝으로 5분도 안 돼 박씨를 돌려보냈다. “수치심을 무릅쓰고 제 사진들이 유포된 방을 용기 내서 다 보여줬는데도 그렇게 얘기하니 속상해서 한참 울었어요. ‘경찰은 가해자 찾는 데 협조해줄 마음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박씨가 한 말이다.
박씨는 결국 직접 가해자 추적에 나섰다. 박씨는 자신의 에스엔에스 비공개 계정에다 팔로워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공개되도록 사진을 올리고, 이 사진이 텔레그램 방에 유출되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자신의 중·고등학교 졸업사진까지 유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박씨는 동창이거나 동창과 가까운 남성 지인들을 용의 선상에 올려뒀다. 그리고 1명씩에게만 사진을 공개해 이 사진이 텔레그램 방에 유출되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직접 추적에 나선 지 나흘 만에 박씨는 한 남성에게 공개한 사진이 그날 저녁 텔레그램 방에 유출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 남성은 박씨와 중·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동창 ㄱ씨였다.
박씨는 이번에는 처음 자신의 사진이 유출된 사실을 알려준 여성의 도움을 받아 강원지방경찰청으로 향했다. 박씨는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으면 다른 경찰서를 가도 똑같은 반응일 거라고 생각해서 직접 가해자를 찾고 다시 신고하게 된 것”이라며 “이미 처음 간 경찰서에서는 수사할 의지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경찰서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강원지방경찰청은 충남 경찰과 달리 “가해자들은 보통 텔레그램에서 지인의 사진을 합성해서 유포하는 행위가 잡히지 않을 거라고 맹신하는데 특정 및 검거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강원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즉시 수사에 착수한 뒤 ㄱ씨의 휴대전화를 압수수색해 텔레그램 방에 유포한 사진을 포함한 박씨의 합성사진 수십장을 확인했다. 박씨와 경찰의 말을 종합하면, ㄱ씨는 박씨의 사진을 수년 전부터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해 피부색이나 얼굴 각도 등을 바꿔 나체사진 등과 합성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스토킹 범죄였다.
강원지방경찰청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가해자는 중·고등학교 동창인 피해자 박씨만을 타깃으로 해 이 여성의 사진을 오래전부터 캡처했고, 합성사진을 제작해 유포했다”고 말했다. 특히 ㄱ씨는 경찰 조사에서 “평소 박씨를 좋아했으나 고백하지는 못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가해자와는 학창 시절에 나눈 대화가 몇 마디 안될 정도로 친분도 없었고 이름만 간신히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결국 비뚤어진 관심과 집착, 비정상적인 성관념의 결과로 이런 범죄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경찰은 지난 14일 텔레그램 메신저에서 ‘지인 능욕 방’을 운영하며 약 1달간 박씨의 합성사진을 올린 방장 ㄱ씨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과 음란물 유포) 혐의로 기소 의견을 담아 검찰에 넘겼다.
하지만 경찰의 초동 대응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부대표는 “이런 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사활을 걸고 가해자 신상정보를 아주 작은 정보라도 조합해 특정한 뒤 경찰서를 찾아가야 그나마 경찰 조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지 않으면 신고 접수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많다”며 “피해자가 처음으로 만나는 조력자이자 공권력인 경찰이 ‘우리는 할 수 없다’고 말하면 피해자는 더 이상 찾아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 박씨 역시 “처음 유출 사실을 알았을 때는 가족까지도 의심하는 등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며 “직접 경험해보니 피해 사실이 수치스러워 신고 자체도 어려운데 경찰이 해결해주려는 의지도 보여주지 않아 더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http://hani.co.kr/arti/society/women/9251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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