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어, 미쳤어"... 손흥민, 그가 눈앞으로 달려왔다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였다. 그는 어느새 나의 눈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바로 몇 초 전까지만해도 저 멀리에 있었는데... 노란색 축구공이 골망을 흔들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들다. 처음 들어봤다. 골망 흔드는 소리를. 나도 모르게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곧바로 거대한 함성이 운동장을 메웠다.
옆에 있던 영국 청년 조쉬는 나와 우리 아이를 껴안고 펄쩍 펄쩍 뛰었다. 물론 그와는 이날 처음 만났다. 그는 혼자 경기장에 왔다고 했다. 경기 시작부터 큰소리로 토트넘 홋스퍼의 응원가를 불러댔다. 경기가 끝나고, 조쉬는 나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단지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날 경기가 전 세계 축구 팬들을 열광시킬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 언론들의 관심은 같은 날 오후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리는 맨체스터 더비(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에 있었다. 사실 이 경기가 빅(Big) 게임이었다.
하지만 손흥민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경기 이틀 전에 날아온 한 통의 메일
지난 5일 오전 휴대폰에 알림이 하나 떴다. 토트넘 홋스퍼에서 회원들에게 보내는 메일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이번주 토요일, 번리와의 경기, 아직 기회 있어!'. 사실 영국에 오면,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언제든지 맘 놓고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프리미어리그를 중계하는 스카이스포츠 채널은 돈을 내야만 볼 수 있다(프리미어리그 생중계는 오히려 한국에서 보는 게 더 편할 정도다).
제대로 된(이것이 중요하다!) 경기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선 토트넘 정식 회원으로 가입해야 했다. 거의 모든 구단이 1년 단위로, 나이에 따라 다양한 회원제를 운영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만 표를 구할 수 있다. 대부분 구단들은 회원들에게 표를 구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준다. 그것도 1인 1매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 등과 함께 표를 살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그들도 일단 회원에는 가입해야 한다. 푯값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팀과 경기를 하느냐, 어떤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적게는 몇 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이 들기도 한다(단기 영국 여행자들이 구매대행 사이트 등을 통해서 구매하는 푯값은 회원가보다 2배 이상 비싸다고 보면 된다).
나는 별 기대 없이 이메일을 열었다. 그리고 홋스퍼의 티켓 구매 사이트로 이동했다. 항상 보았던 대로 그 넓은 경기장의 좌석은 거의 매진이었다. 가득 차면 6만여 명이 넘는다. '3층 맨 꼭대기 자리에 앉으면 경기가 제대로 보일까?'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실제로 직접 앉아보면 경기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잘 보인다. 게다가 이 경기장에는 대형 스크린이 네 개나 걸려 있다. 작년에 새롭게 오픈한 토트넘 경기장은 현대 축구 경기장의 모델링이 될 만하다.
경기 임박해서 나온 티켓들은 대부분 구역별로 한 개짜리 좌석이다. 시즌권을 끊은 회원들이 불가피하게 내놓은 티켓들이다. 나는 연달아 이어져 있는 빈 좌석을 찾았다. 물론 그런 자리는 거의 없다. 중앙 쪽 좌석은 아니었지만, 골대 쪽 1층에서 연석좌석을 발견했다. 구매 버튼을 눌렀다. 성인 49.50파운드, 16세 이하 주니어(Junior) 27.50파운드, 모두 77파운드였다.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12만 원 정도. '오, 웬일이지?'라는 생각과 함께, 바로 알림 메시지가 날아왔다. "고마워, 결재 완료."
북쪽으로(to North), 북쪽으로...
▲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의 경기장 내부. 관람객들이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손흥민 선수 등 주요선수의 사진이 내걸려있다. |
ⓒ 김종철 |
경기는 오후 3시였다. 런던의 12월 오후 3시는 저녁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시각이기도 하다. 3시 30분이면 해가 사라지고, 어둑어둑해지며 겨울 날씨로 바뀐다. 우리는 좀 일찍 나서기로 했다. 악명 높은 런던 지하철의 연착도 생각해야 했고, 지하철에서 내려서 경기장까지 가는 길을 감안해야 했다. 내가 사는 윔블던은 런던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도 자체 축구팀이 있지만, 2부리그에 있다. 굳이 프리미어리그 팀을 고른다면 첼시 쪽 팬들이 많다.
낮 12시에 집을 나섰다. 윔블던은 지하철 디스트릭트 라인의 종점이다. 이제 자리를 잡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열차가 런던 시내에 들어서면서, 빅토리아 라인으로 갈아탔다. 이쯤 되면, 토트넘 문양이 그려진 스카프를 두르거나 모자를 쓴 팬들이 하나둘씩 보인다. 세븐시스터스 역에서 내렸다. 토트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런던 북쪽의 조그마한 지하철역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린다.
1시간여 동안 지하철을 타 역에 도착한 뒤에는 버스를 타든지 걷든지 결정해야 한다. 경기장까지 가는 버스가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 걷는다. 지하철 역에서 경기장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20분 정도 걸린다. 만만치 않은 거리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함께 걷다 보면, 그냥 걸을 수 있다. 지긋이 나이가 든 할아버지가 토트넘 점퍼와 모자를 쓰고, 손주로 보이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걷는다. 젊은 사람들도 많지만, 가족 단위의 팬들도 많았다.
경기장 앞에 도착하니, '손흥민'과 비슷한 머리 스타일과 유니폼을 입은 한국 청년이 서 있었다. 일부 토트넘 팬들을 향해 '프리허그(free hug)' 푯말을 보여주고 있었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외국인 팬들 눈에는 마치 실제 '손흥민' 선수와 포옹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단 생각도 했다.
박지성과 손흥민… 누가 더 위대하냐고?
▲ 12월 9일자 영국 조간신문에는 주말 프리미어리그 경기 내용들이 크게 실렸다. 가디언은 손흥민의 번리전 단독드리블 골을 '금주의 골'로 선정했다(위쪽). 그리고 일간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스포츠면 한면 편집에서 '70미터 박스에서 박스, 이번 시즌의 골?'이라는 제목으로 손흥민의 전력질주 상황을 그대로 그렸다. |
ⓒ 김종철 |
경기장 1층에 마련된 홋스퍼스의 기념품 스토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또 스토어 내부의 조그마한 광장에서는 토트넘 축구팀의 역사를 책으로 쓴 저자의 사인회도 열리고 있었다.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손흥민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과 각종 용품은 이곳에서도 큰 인기다. 물론 여전히 한국 팬들이 강력한 소비층이지만, 점점 더 많은 영국 팬들도 손흥민 상품을 기꺼이 사들이고 있다.
이날 경기 시작 전에 박지성 선수가 이곳을 찾았다. 아시아축구연맹에서 선정한 올해의 아시아국제선수상을 직접 시상하기 위해서였다. 박지성과 손흥민을 한꺼번에 보다니... 영국에서도 축구팬과 전문가들이 '누가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위대한 아시아선수인가'를 두고, 공개적으로 갑론을박을 벌인 적이 있다. 물론 박지성과 손흥민을 두고 말이다.
경기장 내부에는 먹거리도 정말 다양했다. 축구를 보러 온 건지, 먹으러 왔는지 모를 정도로... 일반적인 햄버거는 기본이고,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맥주를 마신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시면서 각자 경기 결과를 예상하고, 서로 베팅을 하기도 한다.
▲ 경기가 끝난후 수많은 팬들은 경기장 내의 스낵코너에 모여 각자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 김종철 |
경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면, 경기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물론 경기장 내 주류 반입은 금지돼 있다. 간단한 먹을거리는 갖고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경기 중에 무엇인가를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선수도, 관중도 철저하게 경기에 집중한다. 경기장 어디에서든, 선수의 몸짓 하나, 표정까지 다 볼 수 있고, 팬들은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반응한다.
경기는 시작됐다. 토트넘에게 이날 경기는 매우 중요했다. 지난해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이라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포체티노 감독의 충격적인(?) 경질은 영국 내에서도 논쟁을 불러왔다. 이어 팀 지휘봉을 잡은 조제 모리뉴 감독은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감독이다.
토트넘으로 부임한 이후 그는 승리를 이어갔고, 자신의 명성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하지만 지난 수요일(한국시간 12월 5일) 그의 마지막 팀이었던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게 첫 패배를 당했다. 맨유에 대한 모리뉴의 복수는 이뤄지지 못했고 언론들은 토트넘의 '모리뉴 효과'가 수명을 다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손흥민은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원더골
▲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홋스퍼의 손흥민선수가 번리와의 경기에서 뛰고 있는 모습. |
ⓒ 김종철 |
이날 경기 초반부터 토트넘의 공세는 거셌다. 선수들의 움직임은 가벼워 보였고, 손흥민은 여전히 빨랐다. 모리뉴 체제에서 수비 부담이 늘어나면서 손흥민의 공격이 약화되었다는 일부 우려도 있지만, 그는 정말 열심히 뛰었다. 카메라에 모습이 잡히지 않을 때에도 그는 항상 뛰고 있었다. 전반 초반 일찍 터진 해리 케인의 선제골도, 모우라의 두 번째 골 역시 손흥민의 발에서 시작됐다.
이번엔 그의 단짝인 델리 알리가 기회를 잡았다. 번리 페널티 진영까지 공을 몰고 온 델리 옆에는 손흥민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손흥민에게 공을 패스했다면, 완벽한 골을 넣을 수 있었다. 결국 델리 알리의 공은 번리 골키퍼에 막혔고, 손흥민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경기장에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델리 알리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분명 화가 나 있었다.
팬들도 알고 있었다. 팬들은 손흥민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역대급 골이 터졌다. 전반 30분께 토트넘 진영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공을 넘겨받은 그가 직접 몰고와서 골을 넣을 것이라고 생각한 선수도, 팬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는 해냈다.
그가 공을 몰고 하프라인을 넘어설 때, 자리에 앉아 있던 팬들이 하나둘씩 일어섰다. 내가 있던 자리는 처음부터 모두 서서 경기를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곳곳에서 "와우(wow)"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거대한 함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찼다.
내 옆에서 정말 열성적으로 응원가를 불러대던 조쉬(Joush)는 갑자기 팔과 어깨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돼, 저런 골을 넣다니…(Oh my gosh! What a goal, goal, goal. Crazy, isn't it?)" 팬들은 이어 곧장 손흥민 응원가를 불렀다. 같은 팀 동료인 모우라 선수는 손흥민에게 박수를 치면서 다가갔다. 손흥민과 포옹을 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박수를 쳤다.
다시 남쪽으로, 남쪽으로…
▲ 영국 런던 북쪽 토트넘의 홋스퍼 새 경기장. 지난해 4월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수용인원만 6만명이 넘어,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올드트레포트에 이어 프리미어리그에서 2번째로 큰 경기장이다. |
ⓒ 김종철 |
전반전이 끝나고, 경기장 대형 전광판과 스넥코너에 있던 모니터 화면에는 손흥민 골 장면이 반복해서 나왔다. 대부분 손에 맥주잔을 들고 있던 팬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아서 손자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온 한 남성은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니, "적어도 최근 10년 사이에 우리 팀에서 이런 골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당신은 충분히 저 선수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된다"면서 "소니(sonny)가 우리 팀에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면서 웃었다.
후반전 역시 그들은 그들의 게임을 했고, 알려진 대로 완벽하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수많은 팬들은 자리를 지키며, '컴온 유 스퍼스(COME ON YOU SPURS)'를 외쳤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손흥민도 경기장을 돌면서, 팬들에게 함께 박수를 보냈고, 고개를 숙였다. 경기장 곳곳에는 한국 팬들의 태극기가 유독 많이 보였다.
태극기 응원을 두고 한국에선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국가 대항전이 아닌 클럽 리그 경기에 특정 선수의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 응원을 어떻게 봐야 하는냐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정답도 없는 것 같다. 다만 내가 만난 일부 영국 축구팬들은 리그와 국가 대항전은 어느 정도 구분하는 것 같았다. 물론 한국 팬들의 태극기 응원에 대해선 그들의 '응원 문화'로 존중하는 것 같다. 오히려 토트넘 구단은 자신들의 공식 소셜 미디어 계정을 통해 한국팬들의 이런 응원 문화를 적극 홍보하기도 한다. 이날도 많은 한국 팬들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오후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경기장 주변엔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경기장 1층에 마련된 스낵코너에는 많은 팬들이 모여, 저마다 오늘의 경기를 총평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기장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겨울 저녁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들었다. 거리에 수많은 팬들은 하나같이 노래를 불렀고, 경기장 인근 펍(pub)에서는 팬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다시 세븐시스터스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시 '남쪽으로, 남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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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19-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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